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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The Name Of The Rose, 장미의 이름
움베르트 에코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장미의 이름>은 1327년 말의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4세기의 유럽은 신 중심의 사고를 하는 암흑기의 중세와 인간 중심의 사고를 하는 근대 사이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호르헤 수도사와 베르나르 귀 재판관을 중세적 사고의 표상으로 나타내고 이들에 대해 윌리엄 수도사를 앞세워 이들의 사고를 비판한다. 윌리엄 수도사는 이성과 과학을 인정하는 근대적 인물로 표현된다.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그의 통찰력과 관찰력은 그의 제자 아드소에게 화장실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오는 잠깐의 시간동안 자신이 본 것-수도사가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갔다가 잠시 뒤 느긋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과 자신이 알고 있던 것-사람이 무언가에 급하게 쫓기듯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무엇인가-을 논리적으로 연관시켜 추론함으로써 화장실의 위치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세상을 단지 신이 만든 것,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만 여기던 중세 시대의 사고, 특히 수도사들의 사고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통찰과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윌리엄 수도사는 악마의 소행으로 보이는 아델모의 죽음을 관찰을 통해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또한 베난티오의 죽음 역시 눈에 찍힌 발자국을 통해 살인이라 결론을 내린다. 모든 것을 악마의 소행으로 여기며 그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던 당시 상황에서, 그는 인간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머리로 생각해서 얻어지는 것에 대해 강한 확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보다 신이 우세하던 중세를 살면서도 인간을 바라본 사람이고, 인간의 사고와 지식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가 늘 무언가를 살필 때면 꺼내들던 돋보기는 과학이라는 인간의 경험적 지식이 인간의 눈을 밝혀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돋보기를 통해 보여지는 사물의 모습을 통해 그는 무엇이 경험적이고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인가에 한 발자국 다가간다. 영화 내내 어두운 방안과 대비되는 밝은 촛불이 그의 얼굴과 머리를 밝혀주는 것도 그가 베일에 쌓인 미스테리한 신적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간이성의 빛으로 사고하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호르헤 수도사로 대표되는 중세의 인간은 인간과 인간의 모든 것을 무시하여 감정과 지식마저 무시한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을 통해 인간의 웃음을 부정하고, 인간의 웃음이 악마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서 신앙도 부정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웃음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에서 그가 신을 매우 엄숙한 종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세와 근대는 신 중심의 사고와 인간 중심의 사고를 기준으로 나뉘기도 하지만 교회가 세속(earthly)에 위치하는지와 종교의 영역에 머무르는지를 기준으로 나뉘기도 한다. 이는 영화에서 살인에 대해 종교적인 법을 기준으로 판단하느냐, 지식과 상식의 법을 기준으로 판단하느냐로 나뉘는 시점을 통해 잘 보여준다. 윌리엄 수도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살인을 ‘사람이 사람을 죽인 행위’라고 생각하는 대신, ‘악마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발생한 불경한 행위’라고 단정 짓는다. 살인에 대한 수도사들의 정의에는, 인간이 들어간 영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신과, 신에 반대되는 악마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며, 인간의 의지가 발현될 여지는 없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종교재판관 베르나르 귀가 수도회 내의 모든 사건을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악마에 의한 것이라 판결하며 악마를 불러왔다고 여겨지는 살바토레와 다른 수도사, 그리고 젊은 여성을 화형에 처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든 것을 신과 종교에 귀의하여 사고하는 중세의 삶의 방식을 매우 극적으로 보여준다.
기존의 교회 세력을 대변하는 베네딕트 학파의 수도원은 마치 일국의 왕의 성채처럼 웅장하다. 그들은 매우 부유하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굶주린 농노들로부터 십일조를 짜낸다. 교황의 사절단은 당시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부와 오만함, 그리고 권력을 극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윌리엄 수도사의 옷과 달리 교황의 사절단은 하얀색과 빨간색, 보석으로 치장된 옷을 입고 나온다. 무채색의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유채색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마차 역시 크고 웅장하다. 진흙으로 인해 마차가 멈추자 농노들을 동원해 마차를 운반하는 그들의 모습에 인간의 존재는 인간이 아닌 단지 신이 만든 부속품으로 여겨지는 자세를 볼 수 있다. 베네딕트 학파는 수도사 외의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한다. 영화에 나오는 농노들은 거의 짐승과 비슷한 수준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수도원의 큰 문은 바깥 세상과 수도원 안을 구분한다. 수도원 주위의 농노들은 물건을 바치고 수도원이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를 먹으며 살아가는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모습을 보여준다. 호르헤 수도사와 베르나르 귀는 기존의 교회 세력과 종교권력을 수호하려는 세력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석한 신의 가르침에 대해 불완전하고 하찮은 인간의 재해석과 문제 제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는 식사시간에 나오는 ‘묻기 전에 말하지 말고 웃지도 마라.’라는 구호에서 잘 드러난다. 이에 비해 윌리엄 수도사가 속한 프란체스코 학파는 기존 질서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윌리엄과 아드소가 장서관을 찾았을 때, 윌리엄은 ‘하느님 말씀의 절대성에 의심을 품도록 부추길 수 있는 사상이 담긴 책이 장서관에 숨겨져 있다’라고 말을 한다. 우베르티노 신부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와 여자를 사랑하게 된 아드소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을,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또한 인간에게 일어난 일을 인간 사이에 일어난 일로 보고 더 이상 신의 계획이기를 거부한다. 사람이 죽은 것은 인간의 행동과 인과로서 발생하는 살인이나 자살의 결과이지 결코 악마의 짓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서의 수도원은 언제나 안개와 구름에 둘러싸여 그 모습이 흐리게 나온다. 근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교회의 위치를 표현하는 듯하다. 또한 베르나르 귀가 도망가다 농노들에 의해 죽음을 맞는 장면 역시 불안전하고 위태로운 교회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 같다.
수도원의 장서관은 기독교계에서 가장 방대하지만 그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인간 지식의 집대성으로서의 책들은, 그것이 신의 말씀, 교회의 해석과 부합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빛을 볼 수도 있고, 매장될 수도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장은 사서와 보조사서에게만 그 공간을 개방하고 수도사들조차도 책을 자유롭게 읽지 못하게 한다. 실제로 중세에는 금서의 양보다 금서 목록이 더 많았다고도 한다. 또한 재판의 과정에서 호르헤 수도사는 ‘지식의 “추구”가 아닌 “보존”’이 수도원의 임무라고 말한다. 이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것만 보존하는데 의미를 둔다. 장서관의 내부는 미궁처럼 꾸며져 있다. 마치 금서들을 보관만 하는 장소처럼 들어가면 나올 수 없고, 함정과 암호로 점철되어 있는 보관소인 셈이다. 그리고 수도원의 장서관이 타버리는 것은 결국은 중세적 지식이 몰락하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무(無)의 상태에서 새로운 의미의 지식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상징한다고도 생각된다.
교회의 인간관이 잘못 된 것이라면 이성적인 윌리엄의 인간관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살바토레와 젊은 여인이 잡힌 후, 아드소는 책을 보고 있는 윌리엄에게 ‘사람보다 책이 중요하세요? 동정심이라곤 없으세요?’라고 묻는다. 이에 윌리엄은 ‘이런 게 나의 동정심이다. 동정심이 불 속에서 구해주진 못한다.’라고 대답을 한다. 과연 윌리엄에게 인간에 대한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가? 그는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이 타인 위에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 역시 인간을 신이 아닌 인간 속에 가두는 새로운 속박이 아닐까? 영화의 최후의 대사에 아드소는 신에게 기도한다. ‘나는 항상 하느님께 그 영혼을 받아주시고 지적 자만으로 행했던 많은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에 비해 아드소는 그 수도원에서 사랑을 나눈 이름도 모르는 여인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이런 것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 아닐까?
이 영화는 나에게 3가지 명제를 던져 주었다. 학파간의 싸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신의 부속품인가? 과연 누가 옳은 것일까? 영화에서 베네딕트 학파와 프란체스코 학파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입으셨던 옷을 소유하셨던 것일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논쟁을 한다. 영화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실제 소설에서, 역사에서는 이 부분이 무척이나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베네딕트 학파는 그리스도가 옷을 소유했다는 것을 핑계로 부를 축적하기를 원하지만 프란체스코 학파는 그것에 반대하여 수도사의 청빈한 삶을 강조한다. 이는 당시의 교회가 주장하던 낡은 지식과 퇴행적 이론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면에 대한 진보적인 무리의 반발을 잘 보여준다. 베네딕트 학파는 성경에서 그들의 진리를 찾고 그들의 해석을 진리라 믿는다. 이에 비해 프란체스코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계승하여 현실에서 진리를 찾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327년 11월은 황제권와 교황권 간의 대립이 일어난 시점이다. 이러한 시점을 바탕으로 새로운, 진보적인 프란체스코 학파는 기존의 보수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베네딕트 학파에 대항하여 과연 그들이 옳은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주체성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중세에는 인간을 신에 의해 창조되고 신에 의해 계획된 운명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본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점이 많이 부각되어 있다. 성경에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만으로 인간의 웃음을 지워버리려고 한 호르헤 수도사와 인간의 일은 신에 의해 결정난다고 생각하는 베르나도 귀 심판관, 사건이 묵시록의 예언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아드소까지. 이들은 인간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살인이 비소로 인해 일어났다는 것은 무시한 채, 자살이라는 것도 무시한 채 신의 뜻이고, 악마의 흉계라고 생각한다. 특히 호르헤 수도사는 지식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의심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이며 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현재의 지식이라 함은 윌리엄 수도사가 지향하는 실증적이고 논리적 추리에 의하여 밝혀진 지식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과 위배되는 책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이었고 호르헤 수도사는 하느님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고대에는 인간의 이성이 칭송 되었지만 중세에 들어서는 인간이 스스로의 사고를 포기하고 신학의 범주 안에 인간 자체를 묻어 버렸다. 근대에 들어서 인간은 신학에서 벗어났지만 새로운 종교, 과학 혹은 전체주의에 빠져버렸다. 현재의 인간에게 과연 주체성은 존재하는 것일까?
호르헤 수도사의 입장에서는 윌리엄 수도사가 틀린 것이며, 신의 말씀만이 오직 진리이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윌리엄 수도사는 자신의 아집에 빠져 자신의 이성이 호르헤 수도사보다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빈번히 일어난다. 대립하는 두 개의 집단의 의견 중 어느 것이 더 옳을까? 그 판단은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
장미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원작 소설의 원래 제목은 ‘수도원 살인사건’이었지만 기독교적인 상징을 가진 장미의 상징성을 따서 ‘장미의 이름’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또한 소설의 맨 마지막 부분엔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아마도 움베르트 에코는 화려한 기독교의 상징만 남았던 근대를 장미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